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고쳐주기를 바랬습니다. 그 때 주님은 들것에 누워있는 환자를 향해서 “걱정말아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라세인 중 율법학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신학자인 것이지요. 이들이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이들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였지만 주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뚫어보셨습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면 그 얼굴에 속마음이 나타납니다. 입으로는 옳다고 하지만 마음 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긷들어 있으면 얼굴 빛에 나타납니다. 대단한 연기 실력이 있지 않고는 그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완전히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낯빛에 드러나는 그런 느낌을 보고 판단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 속마음에 있는 생각을 정확하게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찌 너희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아마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악한 생각이 무엇일지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즉 지금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악한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신학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므로 결코 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다시 말씀을 잇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라 하는 말 중에 어느 쪽이 더 말하기 쉬우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이 두 가지 모두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율법학자들에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죄사함은 오로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며,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일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어느 쪽도 대답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굳이 한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쪽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신실성에 대한 증거를 지금 당장 확인할 아무런 방법도 없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환자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을 내어쫓고 나서 그 지방에서 배척 당하시고 배를 타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온 직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마 9: 1~8). 이 사건에서 주님은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심을 보이기 위해서 중풍병자를 일으키십니다.
능력은 말로만 해서는 그 진실성을 확증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새로운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정보들이 모두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허위로 날조된 정보들이 진실 가운데 섞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 정보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보는 반드시 증거를 지녀야 합니다. 증거없는 정보는 그 증거를 얻기까지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인 성육신과 부활 역시 증거를 필요로 하고 그 증거가 세례자 요한과 주의 제자들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케리그마 역시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신실함과 인격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정도의 증거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이방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외적 증거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한 증거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은 곧 진실을 전하는 것이며, 그 진실을 담보하는 것이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이 나타남이란 말의 헬라어는 파네로스(phaneros)로서 ‘증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증거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개념일수록 그 말의 신빙성을 위해서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확증할 증인이 있으면 됩니다. 사건 현장에 함께 했거나 확인한 사람의 증언으로 확정하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은 별도의 증거가 필요한데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 자신이 증거인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모든 일에서 그 확증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짐으로써 자신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이 진실에 근거했음을 증거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책임은 바로 그 증거가 됩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신실성이 그 증거가 되며, 따라서 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 책임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를 묻는 엄격함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흘러가는 말이라고 해서, 그 진실성을 확증할 길이 없는 말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속여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고 하는 행위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굳이 죄사함이라는 확인할 수 없는 주제를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 입니다. 우리는 확인할 길이 없는 말이라고 해서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진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는지요.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해서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이 전해들은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을 아무런 의식없이 전하는 것 역시 책임의 문제에 걸립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구해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을 단순히 읽어주는 성경 낭독이 아닌 이상 그 말에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할 때 그 증거로 수많은 기적과 치유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증거로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우리는 목회자이든 평범한 성도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나타남은 필수입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학문적 배경이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와 교단 역시 그렇습니다.
선포되는 말에 대해서 그 진실성의 확증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자신이 확인한 내용만 전하는 그런 온전함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저주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성령의 나타남이며, 구체적인 증거가 치유와 능력 행함인 것입니다. 주님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빠짐없이 나타났던 치유와 기적은 우리에게도 역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은 모든 면에서 100% 완전했지만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음성듣기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은 완벽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100%에 이르지 못할 뿐이지 부분적으로 그런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90%에 가까울 수 있고 어떤 이는 고작 10% 정도 주님을 흉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0%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결코 0%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가 희박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고 복잡한 개인적 차이가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 증거를 구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한 말에 자신이 책임을 진다면 구할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는 뉴스에서 어떤 사람이 구속되면서 자신이 모두 책임질테니 걱정말라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여를 거부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증거를 구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무언의 표현인 것이지요. 따라서 그 행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책임을 지게 되며,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말로 인해서 영향을 준 모든 일에 책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의 증거를 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증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책임지면 자신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일으키자 사람들은 참으로 의아해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것으로 증거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나타나심이 참된 증거입니다. 주님도 이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주님이 전하는 모든 말에는 증거하는 이가 따로 있다고 말입니다. 그 증거자를 주님은 치유와 기적을 행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그 증거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장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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